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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가 시대적 문화 코드가 되고 있다. 유명 여자 연예인들이 경쟁적으로 누드집을 내면서 우리 사회에 '벗기 열풍'이 불고 있다. 한번 벗었다 하면 수십억의 매출이 오르고 인기도 높아지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옷을 벗는 행위가 일종의 사업이자 자신을 홍보하는 마케팅 수단이 된 것이다.

누드 열풍이 불면서 가수, 탤런트, 모델, 스포츠 스타 그리고 개그우먼 등 연예인들이 앞 다투어 모바일과 누드집을 통해 누드를 상품화한다. 그리고 연극, 무용, 뮤지컬 등 문화 영역 전반에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다. 신인가수도 누드로 먼저 알리는 마케팅도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시대의 성공코드가 '누드'라는 말까지 등장시켰다.

수단이 왜 누드여야 하나

사람은 누구나 옷을 벗는다. 벗는 것은 인간들의 일상적 행위의 하나이다. 그러나 옷을 벗는 이유나 목적이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동물보호단체 여성 회원들이 전라의 몸으로 거리에 나서는 것은 '모피코트를 입느니 벗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화 반대란 대의명분을 위해, 미국 다국적 의류업체에 대한 보이콧 행위로, 그리고 존엄한 영국 왕실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으로 옷을 벗는 사람들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

영국 북부 요크셔의 40대 주부들은 한 여성협회 회원이 남편을 백혈병으로 잃자, 동료 회원들과 함께 백혈병 연구기금 마련을 위해 누드 달력을 위해 옷을 벗었다. 달력은 불티나게 팔렸고 미국의 인기 토크쇼인 '투나잇 쇼'에 출연하고 영화의 메카 할리우드에서 귀빈 대접 받는 유명인사가 됐다. 결국 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 '캘린더 걸스'가 제작 상영되었다.

이들보다 먼저 옷을 벗어 유명해진 남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국내에서도 개봉된 '풀몬티'다. 70년대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일던 대처 총리 시절 영국 요크셔 지방이 배경인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실직 철강근로자들이었다. 별로 남들 앞에 자랑할 만한 몸을 갖지 못한 이혼남, 뚱보, 한물간 전직 댄서들이다. 이들은 술집에서 뭇 여성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며 옷을 벗지만, 각자의 애환 어린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낙오자들이다.

몇 년 전, 오스트리아 빈의 한 옷가게는 전라로 오는 사람들에게 의상을 한 벌 공짜로 준다는 광고를 냈다. 외신 사진은 그날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남녀가 서로 맨살을 보여주면서 가게 앞에 몰려 있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옷을 벗는 '특별한 이유'는 목적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의 시위문화와 의견제시 그리고 이웃을 돕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과 예술 표현 등이 왜 꼭 누드여야 하는가 말이다.

누가 더 섹시한 몸을 가졌나

이렇게 누드 열풍이 불어 닥친 심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과시하고 또 애써 돈을 내가면서 남의 몸을 보고자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심리현상이 어우러져 있다.

우선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화려한 현대사회에서 외적인 장식이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끌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가 더 아름답고 섹시하게 입었나'에서 '누가 더 아름답고 섹시한 몸을 가졌는가'로 변화했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몸을 가꾸기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그리고 다시 그 몸은 상품이 되어 돈을 벌어들이는 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누드집으로 많은 돈을 번 여자 연예인들을 뒤따라 남자 연예인들도 옷을 벗기 시작했으나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는 여성들이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현실이 깔려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또한 "남자들이 여자 누드를 보고 싶어 하는 것만큼 여자들은 남자 누드에 집착하지도 않는데 이유는 여자들은 성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는 까닭"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남성의 벗은 몸은 영화나 광고 등에 나오는 섹스어필하는 심벌로서의 매력은 가질 수 있지만,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관심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여자들도 같은 여자의 벗은 몸에 더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와 다른 여자를 비교하고 경쟁하는 심리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자들도 때로는 남자누드에 열광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다듬어진 육체는 노출을 열망한다?

우리 육신은 오랫동안 집단의 것이었지만 현대화될수록 개인의 소유 목록 1호에 등극하게 되었다. 이런 육신의 사유화 현상은 풍요의 시대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웰빙족을 선언하거나, 지나친 다이어트를 시도하거나, 성형수술대에 누우면 자기 미학에 맞게 육신을 개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피부 마사지와 피트니스클럽은 개조된 육신을 근사하게 유지하고 보수하도록 돕는다. 문신과 피어싱은 육신에 고유의 브랜드를 부여하는 최종적인 사유화 작업과도 같은 것이다.

육신 숭배가 시대정신이요, 세련된 삶의 스타일로 정착되었다. 다듬어진 육신은 당연히 노출을 열망한다. 배꼽과 허벅지와 팔뚝은 햇살이나 조명 아래로 나서고 있다. 반대로 타인의 멋진 육신은 열망의 대상이며 교과서가 된다. 자신의 몸을 보여주고 싶고 타인의 것을 보고 싶어 안달이다. 이런 욕망은 노출증과 관음증 등 낡은 시대의 어두운 개념에 착 들어맞지 않을 만큼 충분히 정당화되어 있다. 어쨌거나 육신의 사유화 시대의 노출 및 관찰 욕망이 누드 열풍의 배경이고 에너지인 것은 분명하다.

요즘 문화는 CF와 잡지 화보와 무대 위와 인터넷 속에서 육신 숭배의 잔치판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전례 없는 상황은 유명 여성 연예인들이 누드 촬영에 적극 나선 것이다. 언론이 누드 열풍 현상을 거듭 기사화한 것도, 그리고 대중이 누드 열풍을 현실로 믿게 된 것도 그들 여성 스타 덕분이다.

처음에는 그들이 도박을 하는 것 같았다. 여성 스타에게 누드 촬영은 자살골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누드 촬영 필름을 둘러싼 탤런트 K씨의 사투가 그 증거였다. 그런데 엉덩이와 가슴 등 세칭 '속살'을 수십 만 명에게 노출한 후에도 여배우들은 보수적인 안방극장에서 캐리어를 지속할 수 있다. 더러는 없던 탄력도 받아 스타라는 자리로 등극하기도 한다.

포르노 스팸을 정리할까 말까

이런 행복한 환경은 당연히 사회적 금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금기가 왜 약해진 것인가. 금기를 무력화시킨 변수는 바로 포르노그래피의 번성이다. 여성 연예인들이 안심하고 누드를 촬영 배포할 수 있게 된 것은 포르노가 그들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포르노가 관용의 폭을 넓혀 놓은 셈이다. 누구나 실감하듯이 인터넷 강국화는 유례없는 외설적 풍속화를 연출한다. 이메일의 받은 편지함이 포르노 광고 메일 그러니까 '스팸 메일'(sperm mail)의 화수분이 된 지 오래다. 청와대와 산간마을, 청학동 전통마을에서도 교회와 사찰 그리고 시장에서도 포르노 스팸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 일상사이다.

CEO부터 경리사원까지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스팸 메일을 폐기할지 클릭할지 결단한 후에야 업무를 시작하는 세상이다. 삶의 새로운 패턴을 관철해낸 포르노는 영향력을 가진 환경인 셈이다. 빌 게이츠 등 정보통신의 선구자들이 우리의 손끝에 열어놓은 세상은 온통 포르노로 얼룩져 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검지에 힘을 주면 그곳에 빛의 속도로 다다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반복은 눈과 마음의 감각을 감퇴하게 만든다. 도덕성, 윤리성도 뒤로하고 혼자만의 은밀한 세계를 만들게 된다. 강한 자극이 반복될수록 무감각해지고 마는 역설적인 감각의 제국이 열린 것이다.

내면 없는 외면은 껍데기

여성 연예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옷을 벗으며 대단한 모험을 감행한다고 착각한다. 토크쇼 진행자들은 그들의 용기 있는 남자친구를 고무하고 공감과 존중을 표한다. 포르노의 관용정신이 금기의 경계선을 멀찍이 물렸고 그 바탕에서 몇몇이 경계 쪽으로 가볍게 몇 걸음 옮겼거나 흥행사들에 의해 밀려난 것뿐이다.

남자 스타이건 여자 스타이건 아니면 트랜스젠더 연예인이건 그들의 누드는 저수위 고휘발성 이벤트여서 하드코어에도 무감각한 세상 사람들은 진득하게 주목시키지 못한다. 이런 환경은 누드 촬영을 안전한 비즈니스의 한 모델로 보게 되었고 연예인들에게 유혹적인 생계 수단이 된 것이다. 누드 현상은 복잡한 숙제를 내놓는다. 관용해야 할 외설의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일은 국회의원 등 엘리트들이 모여서 규정을 뚝딱 만들어낼 수도 없어 여러 모로 곤란하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크리스천의 눈으로 본 누드열풍, 육신의 상품화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구상의 최대 작품인 사람을 만드셨다. 이세상도 사람도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들이 서로 존중하고 귀히 여기고 보배처럼 살기를 원하신다. 진열장의 상품이 되거나 눈요기감으로 전락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누드열풍은 사람의 내면의 중요성을 쇠퇴시킨다. 외형 지상주의는 우리 속에 있는 성령과의 교통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관심 없게 만든다. 내면이 실종된 외면은 껍데기이다. 내면 없는 외면으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어찌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나관호 목사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뉴스앤조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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